그 큰 서점이 바로 남해안이다. 회색빛 하늘과 간헐적인 소나기를 뚫고 천안을 지나는데 두 시간 반이나 걸렸다. 길이 좁아진 건지 차가 많은 건지 알 수 없다.
35번 고속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비바람과 안개는 아직 정해지지 않은 여정을 말해주고 있었다. 머릿속 가득한 오만가지 생각을 유기할 곳을 찾아 짙은 해무(海霧)와 가는 빗줄기가 깔린 조그만 산을 돌아 들어갔다.
긴 시간 동안의 발품으로 도착한 첫 번째 목적지가 거제 '바람의 언덕'이다. 웬만한 아이는 날아갈 정도의 바람이다. 흩어지고 뭉쳐지는 해무가 얼굴을 때린다.
TV에서처럼 두 팔을 벌리고 서서 잡생각을 날리기엔 딱 좋은 장소다. 거친 일기와는 상관없을 정도로….
군부독재 종식의 상징, 김영삼과 만나다
내년엔 선거가 있다. 총선과 대선, 과연 두 선거의 주인공은? 사나운 바람과 가늠할 수 없고 변화무쌍한 해무 속에서 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을까? 대부분의 정치인이 성지를 순례하고 각오를 밝히듯이 거제 김영삼 전 대통령 생가와 기념관을 들러보기로 했다.
남해안 일부 몽돌 해변의 돌들은 '자갈자갈' 흐른다. 그 소리를 듣고 있자면 무슨 이야기를 해주는 것만 같다. 모가 나지 않은 돌들이 서로 어깨를 받치고 있는 바닷가. 이 해안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있으면 구르는 소리만큼이나 바다가 더 넓게 보인다.
시각이 아닌 청각의 바다가 작은 생각의 배들을 띄워놓았다. 사람들이 세월을 보낸다는 것은 서로 각자의 모가 난 부분을 깎아 나가는 거라고 한다. 주변의 사람들, 친구, 가족들과 맞추어 가면서…. 그래서 어쩌면 고승의 사리(舍利)와도 같은 거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많은 사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아침을 맞이하는 일은 참 축복받은 것이리라.
대한민국 아침의 축복 하나가 군부독재의 종식이라는 역사적 사건이다. 그 주인공은 문민정부를 출범한 김영삼 전 대통령이다. 일단 그의 가장 큰 업적은 32년간의 군사정권을 끝낸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태동부터 거친 군부독재의 시기, 민주화의 바람과 이를 꽃피우기 위한 내재적 동족 갈등, 그리고 그 중심에서의 결심, 다시 일어서는 의기를 통한 긴 여정은 대통령 혼자라기보다는 많은 분들의 이야기가 있지 않았을까 한다.
1992년 12월 18일 긴 역사적 시간을 통해 김영삼은 마침내 한국의 제14대 대통령으로 탄생했다. 국회의원 9선이라는 정치적 경력과 함께 정상을 향한 도전이 끝을 본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 만들기’를 위해 김동영 최형우 김봉조 김덕룡 등 기라성 같은 정치인들이 뒤를 바쳤고, 또 그 뒤에는 ‘초산테러’, ‘국회의원직 제명’, ‘23일간의 단식투쟁’ 등 숱한 정치 이야기가 있다.
특히 목숨을 건 단식투쟁 뒤의 성명서가 아직까지도 귓가에 선명하다. “나는 살기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앉아서 죽기보다는 서서 싸우다 죽기위해 단식을 중단하는 겁니다…(생략), 나의 투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을 알렸을 뿐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정치이야기 보다는 몽돌 해안과 넓은 바다를 마주 대하고만 있어도 얻어지는 해답과 끝없이 내달아 펼쳐진 해안 양식장의 길게 늘어선 막대를 보면서 상상하는 필자의 생각이다.
김영삼의 정치행보와 어울리는 대도무문(大道無門), ‘인상적’
거대한 옥포조선소와 넓은 바다를 동무 삼아 14번 국도를 달려 대금산 밑 조그마한 길가 마을로 들어섰다. 길가 바로 옆에 대통령 생가와 기록전시관이 자리하고 있다. 생가는 일반적 어촌에서 볼 수 없던 열여섯이나 되는 계단 위 대문을 통과해 안마당으로 들어서게 된다.
대통령이 2000년 중국 방문 시 '한원비림' 참관 후 휘호(東方文化藝術寶庫)를 써준 데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기증했다는 청동흉상이 자리하고, 정면에 본채와 우측 사랑채로 구성 되었다. 별관 뒤로는 기념관 2층으로 직접 연결되는 길이 있다.
김영삼 대통령은 1927년 이곳에서 태어나서 초등학교를 다녔고, 1951년 영부인 손명순 여사와 결혼해 신접살림을 차리기도 한 곳이다. 건축 후 100년 이상 세월이 흐르면서 심하게 노후되어 정비가 시급한 차에 1998년 대통령 퇴임 이후 2000년 8월 부친 김홍조 옹이 대지와 건물 일체를 거제시에 기증하였고, 거제시는 2001년 5월에 현재의 모습으로 중건했다.
생가의 본관 정면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라는 가로액자가 마루 위로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 윤리시간에 달달 외우던 호연지기의 뜻을 나이 40대 중반을 넘겨 다시 보게 되니 여러 생각이 든다. 대통령은 이 호연지기를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물론 방안 왼편에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문구가 있다. 대도무문(大道無門)이 세로 액자로 자리한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정치행보와 대도무문이란 문구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 전 대통령도 이 글귀를 자주 인용하다는 얘기를 언론을 통해 들은 적이 있다. 생가 우측의 2층 건물인 기록전시관이 보인다. 2008년 거제시는 이 기록관을 대통령의 정치적 생애와 업적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각종 자료를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관계자는 "전직 대통령과 관련된 기록전시물을 영구 보존하고 시민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기록전시관을 건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고 전시관은 거제시가 시비 50억 원을 들여 2011년 6월로 개관 1주년을 맞았다.
1층의 제1전시실이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성장과정과 정치활동에 대해 소개를 하고 있다면, 2층의 제2전시실은 취임 이후 대통령으로서의 활동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보면 출생과 성장과정, 정계입문, 민주화 투쟁, 대통령 당선, 문민정부 재임으로 구성해 소년~청년기까지의 개인 물품, 38년간 의정 생활의 자료, 총 9번의 국회의원 배지(3,5~10,13,14대)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연설문, 저서, 신문기사, 영부인 손명순 여사의 자료 등을 다양하게 전시해 놓았다.
또한 민주화 시위현장, 중앙청 철거, 군부독재자 재판 등의 모습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져가는 힘들었던 현장, 지금 어린이나 청소년들이 볼 수 없는 광경이 미니어처로 구성되어 있다. 1층 자료열람실에는 약 100여권의 관련 저서 및 논문을 비치, 열람할 수 있게 했고, 입구에는 어린이들의 방문을 증명하는 '대통령 인증서'를 직접 만들어 갈 수 있도록 준비도 해놓았다.
거제시 발전의 책임…김현철 몫
거제시 관련 공무원들이 매장과 안내데스크 등에서 자리를 하고 있었고, 건물은 대체로 깔끔한 인상을 주었다. 며칠 전 6월 17일이 기념관준공 1주년이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직접 다녀갔다고 한다. 기념식에서 김 전 대통령은 "이곳은 나의 기록관이자 이 나라 민주주의의 기록관"이라며 "독재자와 싸우고 또 싸웠다.
이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길이라는 생각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과거 독재에 항거해 인생의 마지막 길이라 생각해 싸우고 또 싸웠다. 마지막 소원은 성숙된 민주주의를 통해 세계사에 우뚝 선 대한민국을 보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개관 후 1년 정도였지만 누적 관광객은 약 백만 명을 넘어섰고, 관광 성수기에는 일일 최대 7천명을 웃도는 사람들이 찾는다고 한다. 생가 계단 입구에서부터 기록전시관 주변은 인근 주민들이 토산품을 팔고 있었다. 남해안 토종멸치를 파는 점포와 바구니 채 채소를 들고 나온 '아지매'들이 늘어선 곳 가운데 매콤하고 비릿한 남해안의 자랑 '멸치 회무침'을 청량음료와 함께 맛보게 되었다.
입안이 매워도 정신없이 '괜찮네'를 외치는 필자를 보고 식당 주인은 "많은 사람이 오가는 생가, 기념관도 좋지만 안정적인 장사가 될 수 있는 주변 환경이 같이 개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말하고 있었다. 역시 국민들은 전직 대통령과 관련된 국민 자긍심도 좋지만 생활을 영위하는 하루하루에 더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이제 이런 거제의 발전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아들인 김현철 여의도 연구소 부소장의 책임이 됐다. 김 부소장이 거제에서 내년 총선 출마를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19대 총선을 통해 금배지를 달아 거제시민의 바람을 이뤄줄 수 있을까.
이번 거제 기행의 마무리로 제안을 하나 한다면, 수려한 경치에 맞춘 교육시설의 확충이다. 이를테면 거제 민주주의 교육관, 하의도 민주체험관, 봉하 민주/민생관처럼 말이다. 그러면 주변지역의 개발, 일자리 창출, 전직 대통령의 정치신념 유지와 계승 등의 부가효과가 발생하지 않을까 한다.
출처 = 시사오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