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99억의 여자'가 지난 1월 23일 최고시청률 8.5%라는 유종의 미를 거두며 8주간의 여정을 마무리했다. 믿고 보는 배우들의 연기와 그들의 화합, 파격적인 전개까지 무엇 하나 놓치지 않은 99억의 여자는 방영 전부터 종영까지 시청자들에게 긴장감을 안겼다.
특히 배우 이지훈은 이전 작품인 '신입사관 구해령'의 반듯한 모습으로 훈훈함을 자아내던 민우원, 불의에 맞서던 '사의찬미' 홍난파 등의 선한 역과는 180도 다른 모습을 선보이며 눈길을 끌었다. 운암 재단 운영 본부장이자 윤희주(오나라 분)의 남편이자 99억을 가진 정서연(조여전 분)과의 파격적인 불륜 연기까지 거뜬히 소화한 이재훈 역으로 변신했다.
2020년 1월 28일, 서울 강남구 소재의 한 카페에서는 '99억의 여자' 종영 기념 배우 이지훈의 라운드 인터뷰가 진행됐다.
"안녕하세요, 서른세 살 이지훈입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살갑게 웃으며 등장한 이지훈은 브라운관 속 악역을 연기한 이재훈과 동일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서글서글한 모습이었다. 반가운 인사로 분위기를 가볍게 풀어낸 천진함이 느껴지는 순간이기도 했다.
Q. 드라마 종영 소감이 궁금하다.
작년 4월부터 신입사관 구해령으로 시작해서 99억의 여자로 한 해를 보냈다. 봄부터 시작해 계절을 다 보내고 끝냈다. 신입사관 구해령에서 쌓였던 것을 99억 원으로 다 풀어내고, 노력한 것 같아 속이 시원하다.
신입사관 구해령의 민우원이란 캐릭터는 올곧고, 올바르고, 바른 말만 하는 역할이었다. '못됨'이라는 것은 전혀 없는, 제가 연기한 인물이지만 사람 같지 않은 인물이어서 그렇게 느낀 것 같다. 하지만 99억 원의 여자에서는 민우원이라는 캐릭터가 갖고 있지 않은 연기로 제가 할 수 없던 연기를 보여 드릴 수 있어 좋았다. 그래서 속이 시원했다.
Q. 이미지 변신을 했다.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은 했다. 대본을 받고, 대본 리딩을 갔던 것이 신입사관 구해령 촬영을 끝내고 가던 때였다. 떨리고 긴장도 됐지만 차에서 내리자마자 설렜다. 원래 겁이 없는 편인데 내 모습 그대로 선배 배우분들과 부딪히면 얻는 것도 많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 생각에 어렵다기보다는 버텨 보려고 했다.
Q. 부담은 안 됐나?
당연히 부담됐다. 처음 접해 보는 캐릭터는 모두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상 속 인물에 살을 붙이는 과정은 재미있고 흥미롭다. '이렇게 해 보면 되지 않을까?'라는 고민들이 저를 즐겁게 해 주더라.
Q. 극중 이재훈 역과는 달리 순둥한 이미지가 강한데, 실제로는 어떤지?
아직도 애같고 철없는 모습도 많다. 여리기도 하다. 나이는 서른셋이지만 저는 아직도 제가 고등학생 같다.
Q. 반듯한 외모에서 반전 매력의 배역을 선보였다. 특별히 신경쓴 부분이 있나?
시놉시스를 처음 받았을 때 이재훈이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가정이 있음에도 철없고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계산된 연기라는 걸 보이면 보시는 시청자분들이 불편하겠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날것대로, 투박하고 과장스럽고 오버스럽게 보여질지라도 연기할 때 계산하지 않고 제가 느껴지는 대로 반응하고 표현해야겠다고 생각핬다.
그렇게 해야만 이재훈이라는 사람의 애같은 모습이 보여질 것이라 생각했고, 그래야 시청자분들의 입장에서도 원래 저런 이미지일 것이라는 점이 납득될 것이라 생각했다. 다른 노력보다는 계산하거나 꾸미지 말고 있는 그대로, 아이가 대본을 봤을 때처럼 표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장 크게 잡고 연기했다.
오나라 누나와는 연상연하 커플이었기 때문에 어느 부분에서 중심을 잡을까 고민하다가, 목소리가 가벼워지면 정말 철없는 아이처럼 보일 것 같아 그 부분을 두 번째로 신경썼다.
Q. 부인인 윤희주(오나라 분)에게 전화로 사랑을 고백하며 숨을 거두는 부분이 인상적이더라.
전날 밤 대본을 받고 감정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새벽에 오나라 누나에게 문자를 드렸다. 호텔에서 전화로 혼자 연기를 해 보고, 오나라 누나에게 이런 호흡이 될 것 같다고 했다.
오나라 누나는 집에서 대본을 보며 통화해 주셨다. 목소리가 들리는데 감정이 올라오더라. 보통 전화신은 상대방의 대사를 외우고 들린다는 생각으로 연기를 하지만 실제 이재훈이 죽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오나라 누나에게 촬영할 때 통화를 할 수 있겠냐고 부탁드리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중간중간 앵글을 바꾸면서 찍어 6번이나 통화해 주셨다. 둘 다 울면서 전화했다.
Q. 그렇게 해 주는 경우가 잘 없지 않나.
윤희주와 이재훈의 감정을 이어나가기 위해 촬영이 끝나면 집에 돌아와 전화를 하곤 했다. 일주일에 못 해도 두 번씩은 통화를 나눴다. 대본 리딩날에는 첫날부터 얼굴을 들이밀며 '여보'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터야 선배 배우분들 사이에서 편하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정말 큰 마음 먹었다.
Q.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나.
굉장히 많다. 조여정 누나와 키스한 신도 기억에 남고, 오나라 누나와 함께 처음 같이 나온 신도 기억에 남는다. 윤희주에게 이야기한 뒤 키스를 하고, 손으로 입술을 닦고 나간다. 대본에는 없는 장면이었지만 감독님께 의견을 여쭈니 괜찮다고 하시더라. 모니터를 하는데 부부의 관계가 이 장면 하나로 너무 쉽게 설명이 돼서 기억에 남는다.
Q. 함께 출연했던 배우 정웅인이 '악역 꿈나무'라는 수식어를 붙였는데.
사실 연기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악역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마다 과거가 있고, 그렇게 만든 상황이 있지 않나. 그 역이 주어진다면 최대한 많이 고민하고 상의해서 나쁘지마 사연이 있는 악역을 연기하고 싶다. 제가 연기하는 악역은 그런 악역이었으면 좋겠다.
하지만 정웅인 선배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진짜 '센 악역'을 해 보고 싶다. 그럼에도 시청자분들 입장에서 공감하는 악열을 하고 싶다.
Q. 전작인 신입사관 구해령과는 극과 극의 역할을 소화했다. 어렵지는 않았나? 또, 민우원과 이재훈 중 어떤 역할이 더 자신의 성격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나?
오히려 달라서 좋았다. 성격상 비슷해지는 게 싫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다르게 보여 드릴 수 있을까 하고 고민을 많이 했을 것 같다. 사실 달라서 더 재미있기도 했다. 어떤 역할이 더 잘 어울리는지는 잘 모르겠다. 제 속에는 나쁜 점도, 선한 점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실 저는 멜로가 하고 싶다.
Q. '기승 전 멜로' 아니냐.
이상하게 자꾸 저는 가만히 있는데, 보시는 시청자분들이나 팬분들께서 자꾸 '멜로 눈깔'이라 하시더라. 자꾸 그런 이야기가 들리니 '나도 할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들더니 이제는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로맨틱 코미디가 아닌, 슬프고 가슴 아픈 멜로를 연기해 보고 싶다.
Q. 처음 데뷔는 청춘극(드라마 '학교 2013')이었기 때문에, '청춘 스타' 행보를 걸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에 대한 아쉬움이나 갈망 같은 건 없나?
물론 그에 대한 갈망이 없다면 거짓말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배우가 되고 싶어 이 일을 시작했는데, 제 머릿속에는 배우라는 것보다는 스타에 대한 생각에 쫓겼고, 그러니 힘들어졌다.
그러던 와중에 회사를 옮기게 되고 '하우스 헬퍼' 종영 후 신입사관 구해령을 시작하게 되는, 일을 하지 않는 7개월 동안 제가 저를 괴롭혔다. 그런 생각들이 저를 얽매다 보니 초심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과 함께 피폐해졌다. 일을 하지 않는 7개월 동안 별 생각 없었고, 뭘 해야 할지 몰랐고, 제 자신이 흐트러졌다. 제가 해야 하는 길이 명확하다고 생각했지만 어느 순간 돌아보니 흐지부지돼 있었다. 친구들과 지금 회사의 대표님, 형들, 매니저 친구들에게 의지를 많이 했다. 골프도 치고, 책을 잘 못 읽는 사람인데도 쉬운 책들을 사서 읽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걸지 말라'는 책을 읽었다. 그 책에 제가 고민하고 있던 것들이 전부 쉽게 쓰여 있더라. 그렇게 조금씩 털어내다 보니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내가 가야 할 길을 가야만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고, 스타의 자리는 내 마음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뜻과 시기가 맞아야 되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 그에 대한 마음이 많이 없어졌다. 그때는 정말 힘들었지만 그 시기가 필요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Q. 7개월이 사실 긴 시간도 아니지 않느냐. 작품이 늦어진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나?
체육을 전공했고, 전공자가 아니다 보니 작품을 하는 것이 곧 부딪히고 앞으로 나가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들어 쉬지 않고 계속 했던 것 같다. 밑천이 드러날 때까지 작품을 못 하게 되는 상황에서, '내가 작품을 하게 되면 잘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했다. 무슨 이유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에 대한 믿음이 많이 약해졌던 것이라 생각한다.
*인터뷰 ②에서 계속
(데일리팝=이지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