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날을 혼자 지내야 하는 이들에게 아플 때만큼 서러운 일도 없다. 실제 2020년 서울시 복지실태조사에 따르면 1인가구로서의 힘든 점을 묻는 질문에서 ‘몸이 아프거나 위급할 때 대처의 어려움’이라는 응답(32.5%)이 가장 많았다.
특히 병원과 약국이 모두 문을 닫은 밤 늦은 시간 갑작스럽게 통증이 시작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난감하기만 하다. 몇 년 전부터 편의점에서도 간단한 비상약을 판매하고는 있지만, 가까운 편의점에 비상약 구비가 안 되어있거나 필요한 약이 없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앞으로는 낮밤에 관계없이 약사와의 상담을 통해 약을 구매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지난 20일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제22차 신기술·서비스 심의위원회를 열고 화상투약기의 실증특례를 승인했다. 이에 따라 이르면 올 하반기부터 수도권 지역 1곳에 화상투약기 설치·운용 가능성이 높아지게 됐다.
화상투약기는 쉽게 말해 의약품 자판기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일반 자판기와 다른 점은 화상통화를 할 수 있도록 카메라와 화면이 탑재돼 있어, 실시간으로 약사와의 화상통화가 가능하다. 굳이 대면하지 않고도 증상에 맞는 약을 처방받고, 복용방법 및 주의사항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화상투약기가 처음 개발된 것은 지난 2012년이지만, 10여년 간 약사단체의 거센 반대와 약국법의 제한으로 인해 상용화 되지 못했다.
2016년 보건복지부가 심야시간 또는 공휴일에도 개설약사의 복약지도 하에 자판기를 통한 일반의약품 구매가 가능하도록 하는 약사법 개정안을 입법예고했지만, 이 역시 날선 반대에 부딪혀 좌초됐다.
그러나 코로나19를 계기로 비대면진료 필요성과 수요가 높아짐에 따라 화상투약기는 다시 화두에 오르게 됐다. 정부는 지난 2019년 1월 과기부 ICT 규제 샌드박스 실증 규제 특례 과제로 화약투약기를 선정, 지난해 12월 제21차 심의위원회에서 심의를 진행했다.
그 결과, 화상투약기의 실증특례가 조건부 승인 됐으며 최대 4년간 주어지는 실증 특례 기간 동안 필요성이 인정돼 약사법 개정이 이뤄지면 정식으로 시장에 출시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하지만 화상투약기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하기만 하다. 약사단체의 반대기조가 여전히 굳건하기 때문이다. 대한약사회는 실증특례 승인 직후 정부의 결정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대한약사회는 화상투약기가 안정성을 위해 대면으로만 이뤄져야 하는 원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또 화상만으로는 환자의 상태를 살피는 데 한계가 있어 안정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다. 의약품 오투약으로 인한 부작용 증가와 개인 민감정보 유출에 대한 우려도 내놨다.
조양연 대한약사회 부회장은 한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화상투약기 한 대당 2000만원으로 이걸 1000대를 설치하면 200억원이 넘는다. 그런데 이 비용은 약사들이 내는 것”이라며 “국민 불편은 국가가 해결해야 하는데 약사 개인 자본으로 충당하라는 것은 가혹하다”고 밝혔다.
대한약사회는 현재 성명을 통해 비대면 진료를 위한 정부와의 협의를 중단하고 단 한 곳의 약국에도 해당 기기가 설치되지 않도록 하는 등 실증특례 사업에 협조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내비치고 있다.
이에 따라 10년 간의 몸살 끝에 겨우 상용화에 한 발짝 다가 선 화상투약기는 앞으로도 적잖은 진통을 겪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